본 페이지는 PC 버전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png)
.png)









.png)
.png)




기름 냄새가 희미해졌다. 이제는 숨을 들이마셔도 무취의 공기만 모일 뿐, 아니, 싱크대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수돗물 비린내가 벌써 익숙해진 것뿐이었다. 이오리는 세차게 쏟아 내리는 물속에 컵을 집어넣었다. 들러붙어 있던 거품이 크게 부글부글 일더니 물살에 씻겨 내려갔다.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결국 단명에 녹아내리는 공주처럼. 흔적은 남지 않았고, 형광등 불빛을 받아 눈이 부신 유리컵은 뽀득 소리가 났다.
미츠키와 오랜만에 단둘이 저녁을 먹었다.
야마토와 소고는 각자 스케줄로 돌아오지 않았고 미성년자 세 명은 반리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아직 문밖으로는 노을이 다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기숙사 안은 새벽이 찾아온 듯 고요했다.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쾅, 크게 들려서 이오리는 어깨를 떨며 놀랐다. 갓 쌓인 눈에 발자국을 남기듯 이오리는
“다녀왔습니다.”
라고 말했고,
“어서 와, 이오리.”
안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이오리는 조금 더 놀랐다. 미츠키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진 시선은 균형 잃은 젠가 탑처럼 급속하게 형태가 무너졌다. 미츠키는 눈썹을 팔자로 휘며 웃었다. 그리고는 키가 큰 동생에게 손을 뻗었다. 이오리는 신발을 벗는 척 고개를 숙였다. 발뒤축을 다시 구두 안으로 쑤셔 넣고는 또 한 번 신발을 벗었다.
“미안, 놀랐어? 녹화가 빨리 끝나서 일찍 돌아왔어.”
작은 체구에 비해 조금 큰 손은 이오리의 까만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유리 세공품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거나, 어긋난 조각을 다시 밀어 넣어 젠가 탑을 말끔한 형태로 정리하는 것처럼. 다시 고개를 든 이오리는,
“저도 촬영이 일찍 끝나서 빨리 돌아왔어요.”
미츠키를 따라 웃었다.
자연스럽게 같이 거실로 향하면서도 미츠키는 연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으음, 하고 낮게 신음을 흘리던 그는 이내 이오리를 올려다보며 “아무래도 우리 둘이 저녁 먹는 게 낫겠는데?” 물음에 가까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아저씨, 한잔 걸치고 올 모양이야. 다른 녀석들도 늦을 것 같고.”
대각선 아래로 눈을 굴리면 휴대폰 화면이 보였다.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백하고 파리한 빛이 여섯 시를 비추고 있었다.
부엌으로 향한 미츠키는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여느 때처럼 이오리에게 물었다.
“이오리, 먹고 싶은 거 있어?”
만들기에 성가시지 않으면서도 시간이 걸리지만 이오리가 먹고 싶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메뉴, 의도가 들키지 않을 메뉴, 는 없었다. 마침내 나온 대답은 무난했다.
“형이 만들어준 것이라면 뭐든 맛있는걸요.”
“그런 주문이 제일 어렵다고?!”
미츠키는 과장되게 소리쳤다. 그러나 다른 주문을 받지는 않은 채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좋아, 그럼 평범하게 가정식이라도 만들까!”
라면서 냉장고를 뒤졌다. 어디에 들어 있었는지도 모를 식재가 미츠키의 손에 연행되어 하나씩 밖으로 끌려 나왔다. 즉흥적으로 결정된 메뉴치고는 구색이 제대로 갖추어질 양이었다. 손을 씻고 온 이오리는 미츠키 옆에 섰다.
“저도 도울게요.”
“그럼 거기 야채 썰어줄래?”
미츠키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자 표면이 약간 눅진한 양배추와 양상추가 도마 위에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몇 시야?”
“…여섯 시 십삼분이네요.”
“그렇구나.”
쌀을 씻고 달걀을 깨는 미츠키의 손이 부자연스럽게 한 템포 빨라졌다. 일곱 시부터는 미츠키가 출연하는 드라마가 시작한다. 미츠키의 녹화가 빨리 끝난 것도 사무소 사람들과 함께 보도록 스태프가 배려해준 덕분이리라. 미츠키는 엇박으로 먼저 나아가는 손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말이 많았다.
“왠지 둘이서 저녁 먹는 거 오랜만인 것 같네.”
메뉴가 아니라 말도 주문이 된다면 ‘왠지’와 ‘같네’는 빼주세요, 라는 주문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오리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그렇네요.” 대꾸했다.
김이 피어나는 따뜻한 쌀밥, 짭조름한 기름 냄새가 나는 닭튀김, 노랗게 광택이 도는 달걀말이, 푸른 색채가 선명한 샐러드, 버섯과 파가 송송이 내려앉은 된장국. 이오리는 식탁 앞에서 미츠키를 마주 보고 앉아 합장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튀김을 깨어 문 미츠키가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음, 내가 만들었지만, 맛있어.”
혀 위에서 부드럽게 뭉개지는 달걀말이를 씹으며 이오리도 대답했다.
“역시 형이에요.”
미츠키가 만든 음식은 부모님이 만든 음식과 닮으면서도 달랐다. 미츠키가 만든 달걀말이는 더 푹신하고 달았다. 된장국은 파 향기가 감돌며 싱거웠다. 어느 쪽이 더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형이 좋아?”라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전, 이오리는 토크쇼에서 짓궂은 MC에게 ‘같은 유닛인 나나세 씨가 더 좋은가요, 아니면 형인 미츠키 씨가 더 좋은가요?’라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미츠키는 답지 않게,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 사람처럼 다급하게 끼어들며, “우왓, 안 돼요! 이오리에게서 ‘나나세 씨가 더 좋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으면 저 멘탈 부서질지도 몰라요!”라며 손을 휘저었다. 이오리는 여지를 묻어버리기 위해 역시나 당황한 척 소리쳤다.
“형, 그거 혹시 제 성대모사였나요?”
“응, 그런데?”
“전혀 안 닮았어요!”
“아니, 닮았거든!”
“자, 형제 토크는 그만하시죠?”
객석에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대답은 나오기도 전에 끝이 났다. 이오리는 식탁 위에 샐러드 그릇을 놓으며 그때 못했던 대답을 떠올렸다.
단둘만의 저녁 식사는 네 식구보다 조용하고 혼자보다 소란스러웠다. 젓가락이 밥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어색한 대화에 겨우 묻혔다. 주로 미츠키가 물었고 이오리가 대답했다.
학교는 어때? 타마키는 수업 잘 들어? 일은 지치지 않아?
미츠키는 바로 몇 시간 전에도 봤으면서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안부를 물었다.
평범해요. 요츠바 씨는 수업에 좀 더 집중해야 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모아 쏟아낸 질문은 바닥을 보였으나 아직 그릇은 비지 않았다. 미츠키는 어려운 말을 꺼낼 것처럼, 어, 음,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돌아서인지 평소보다 입술 색깔이 더 진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있잖아, 이오리.”
미츠키는 튀김을 젓가락 끝으로 툭 건드리더니 집어 들어 이오리의 그릇에 넘겨주었다.
“오늘 드라마 봐줄 거지?”
덩그러니 그릇 안을 구르는 튀김을 내려다보는 정수리에 대고 미츠키는.
“나는 부끄러워서 같이 못 보겠어. 그래도 이오리는 봐주지 않을래? 처음에 다들 반대했었잖아. 그래도 이오리는 응원해줄 거라고 난 믿고 있었거든.”
허겁지겁 변명을 입에 담았다. 이오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속으로 튀김을 밀어 넣었다.
매니저가 반대한 드라마였다.
빈번히 등장하는 키스신이 아이돌인 미츠키의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미츠키 역시 처음에는 거절했다. “이런 건 사무소 방침을 따라야 해서요.”라던 미츠키의 고집을 부러뜨린 것은 말 한마디였다.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꼭, 응원할게요!” 겨우 그 말이.
태생이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기대를 받으면 그만큼 해내야만 하는,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고 응원해주는 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날 밤 매니저에게 고개 숙인 미츠키를 봤을 때, 이오리는 강렬한 예감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미츠키는 주먹을 꽉 쥐며 사과했다.
“미안해, 매니저. 그런 말을 들었는데…, 차마 안 하겠다고 할 수가 없더라.”
언젠가는 그가 가진 천성이 창백한 목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영원히 여섯 시에 머물러 있지 못하듯이 저녁 식사에도 끝이 왔다.
“잘 먹었습니다.”
“맛있었다, 그렇지?”
이오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빈 그릇을 개수대로 옮기는 미츠키에게 이오리는, “형이 만들어주셨으니까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라며 그럴듯한 논리를 가장하여 말했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는 사람처럼 시선을 마주한 채로. 미츠키는 휴대폰을 열어 힐끔거렸지만, 다른 저항은 하지 못했다.
“알았어…. 그럼 부탁할게.”
미츠키는 망설임 없이, 혹은 그런 척을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오리는 수도꼭지를 열었다. 쏟아지는 물이 적당히 차가웠다. 지금쯤 미츠키도 방에서 텔레비전을 켰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손을 닦고 설거지를 미루고 텔레비전을 켠다면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바라마지않던 ‘듬직하고 남자다운’ 형. 남자들의 이상형인 청초하고 아름다운 여자. 그 여자와 입을 맞추는 형. 로맨틱한 배경과 음악. 이 둘이야말로 아담과 이브라고 강요하듯이 꽉 찬 화면.
이오리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 동생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까? 멤버로서 칭찬해주어야 할까? 어떤 것이 가장 이상적인 대응일까? 어떤 것을 미츠키가…… 형이 가장 원할까.
‘퍼펙트 고교생’이라는 별명답지 않게 이오리는 이따금 답을 찾지 못했다. 특히 미츠키가 관련되면 더욱 그러했다. 미츠키가 매니저에게 사과한 그날, 이오리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미츠키를 응원하는 것이 옳은지, 매니저와 함께 미츠키를 말리는 것이 옳은지, 고민에 고민이 거듭된 탓이었다. 어두운 정적 속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이오리는 다가가 문을 열었고 고개를 조금 숙이니 미츠키의 실루엣이 보였다.
“미안해, 이오리. 늦은 시각에.”
이오리는 문에서 비켜섰다.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미츠키는 들어와 문을 닫고 등을 기대었다. 불을 켜지 않아 형태만이 또렷한 미츠키는 꼭 유령 같았다. 미츠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오리는 미츠키의 두 눈이 자신의 눈을 꿰뚫어버릴 듯이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세요, 하고 운을 떼기도 전에 미츠키가 말했다.
“연습 도와줄래.”
문맥이라고는 없는, 평소의 미츠키 답지 않게 불친절한 말이었다. 심지어 부탁보다는 다그침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럼에도 이오리는 어떤 연습인지 이해했다. 그 순간, 눈앞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미츠키가 온전하게 낯선 타인으로 느껴졌다. 이즈미 미츠키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즈미 이오리는 가족으로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즈미 이오리는 멤버로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수많은 문제가 말이 되기도 전에 입술에 걸려 넘어지듯 튀어나왔다.
“형, 저기…….”
“미안!”
미츠키는 그제야 평소처럼 아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좀 그렇지? 그거잖아! 미안했어! 잘 자!”
이오리가 잡기도 전에 미츠키는 문을 열고 뛰쳐나갔고, 이오리는 미츠키가 남긴 채 떠난 ‘좀 그렇지’, ‘그거’의 의미를 여태껏 풀지 못했다. 미츠키의 상대 역할인 여자는 ‘좀 그렇지’와 ‘그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겠지. 그 정답을 텔레비전 화면 가득 전국에 자랑하고 있을 테고. 이오리는 그날 자신도 모르게 해버린 말이 정답이었는지 아직도 모른다.
이제 개수대에 남은 것은 컵뿐이었다. 투명한 유리컵 가장자리에 입술 모양대로 희미하게 립스틱 자국이 찍혀 있었다. 유독 입술 색깔이 눈에 밟힌다 했더니 화장을 지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오리는 물을 묻혀 손가락으로 립스틱 자국을 닦았다. 두어 번 문지른 후에야 색깔이 남지 않았다. 이오리는 컵을 들어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자리를 핥았다. 거품이 된 감정은 비린 수돗물 맛이 났다.

숙소 거실의 테이블 위에 낯선 물건이 올려져 있었다.
"이게 뭔가요?"
이즈미 이오리가 그렇게 물었을 때, 대답을 한 것은 이즈미 미츠키였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래. 장난감처럼 생겼지?"
그의 말마따나, 그것은 카메라라기보다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 법한 카메라 모양의 장난감처럼 생겼다. 이오리는 카메라의 하얀 몸체와 까만 버튼, 아랫부분이 넓은 모양새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것을 손에 들고 렌즈 부분에 눈을 대 보던 그가 문득 "아, 여기를 누르면 되는 건가요?" 라고 묻자, 미츠키는 "응, 이오리는 역시 배우는 게 빠르네." 하고 대답하고는 한 손에 설명서를 들고 팔락거리면서 웃었다.
미츠키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매니저가 가져다 준 것으로, 다음 아이나나이트에서 쓰일 것이라고 했다. 이오리는 렌즈 너머로 천장이나 바닥, 화분 같은 것을 비춰보았다. 최근에는 핸드폰으로만 사진을 찍어서 그런지 카메라라는 것을 손에 들어보는 것자체가 오랜만이었다. 늘 보는 거실의 풍경인데도 렌즈 너머로 보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가장자리가 굴절된 시야가 한 곳으로 집중되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오리?" 미츠키가 문득, 카메라 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올라가 미츠키를 비춘다.
미츠키는 여전히 조금 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오리는, 자신의 앞에서 미츠키가 주로 짓곤 하는 표정을 쉽게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 표정을 친애라고 불러야 할까, 자애라고 불러야 할까. 이오리는 무의식적으로 셔터의 버튼을 눌렀다. 찰칵, 슈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필름을 한 장 뱉어냈다.
"찍은 거야?"
"아…… 네."
말이라도 하고 찍지. 그 말은 별로 핀잔을 주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오리는 적잖게 당황했다. 사진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집어 허공에 들고 말리면서, 미츠키의 웃는 얼굴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 당황스러운 마음은 차차 가라앉았다. 사진은 조금 흔들렸지만 미츠키의 어떤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해낸 것 같았다. "나,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미츠키가 말했다. 심상한 말투였다.
"이오리도 한장 찍어줄까?"
아니, 됐어요, 저는…… 이오리가 어물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불공평하잖아. 이오리만 내 사진 찍고. 미츠키는 고집스럽게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이오리는 순간, 미츠키가 보는 렌즈 너머의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버렸다. 그러느라 저항이 누그러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미츠키가 셔터를 눌렀다. 웃어, 이오리. 미츠키가 말했고, 찰칵,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이오리는 자신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진 속의 이즈미 이오리는 어딘가 망연한 듯한 표정이었다.
"바보 같은 얼굴이네요."
"그래? 이오리는 바보 같이 보이지는 않는데."
미츠키가 말했다.
이즈미 미츠키와 이즈미 이오리의 집에는 사진 앨범이 많았다. 그들의 부모님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이들이 자랄 때마다 그 순간을 기록하는 것처럼 한번씩 구식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인 사진은 양이 꽤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사진들은 아이보리색 앨범에 담겨 거실의 장식장 안에 들어 있었다. 그들의 부모님은 그들 각각의 사진보다 둘이 함께 있는 사진을 더 많이 찍었는데, 미츠키가 이오리의 손을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이라든가, 둘이 같이 무언가를 먹고 있는 사진 같은 것들은 앨범 안에서 제법 흔한 것이었다.
이오리는 기억력이 좋았다. 그는 꽤 어릴 적의 일까지도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가 가진 가장 최초의 기억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그가 세 살일 무렵의 일이었는데, 이오리는 문득, 아버지가 들고 있던 구식 카메라에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는 이오리의 손에 카메라를 들려주었다. 카메라는 어린아이의 여린 손목에는 꽤 무거울 법 했는데도, 이오리는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 아버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것의 작동법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뭔가 찍어볼래? 그 말에, 이오리가 피사체로 선택한 것은 당연하게도 미츠키였다.
그때 미츠키는 창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는 무엇이 즐거운 것인지 고개를 젖히며 웃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 가장자리에 햇빛이 희미하게 번져 보였다. 어린 이마에 빛의 입자가 가루처럼 흩어져 있었다. 이오리는 창가가 밝은 것이 아니라 미츠키에게서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의 착각이었으나, 어쩐지 지금까지도 착각처럼 느껴지지는 않는 기억이다. 그때도 이오리는 무의식적으로 셔터의 버튼을 눌렀다. 찰칵, 하고.
사진만큼 명확하게 고정되는 시선이 있을까?
그것은 이오리가 처음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이오리는 미츠키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읽고 있던 책 사이에 끼워 두었다.
변명 거리는 많았다. 책갈피가 없어서, 책상 위에 있던 것을 아무거나 끼워 두었어요. 마침 형의 사진이 거기에 있어서. 장난으로 찍은 거니까, 아무렇게나 놔둬서, 그러니까…… 그 말들은 스스로 듣기에도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이오리는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미츠키는 발치에 떨어진 흰 사각형의 종이를 들어올렸다. 뒤집어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잠시 이게 언제 찍은 것인지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그 사진을 찍은 지는 꽤 되었고, 이오리는 무언가 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말해야한다고 생각할수록, 말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혀가 바짝 말랐다.
"이오리." 미츠키가 그를 불렀다.
바닥과 발치를 헤매던 시선을 들어올리자, 미츠키가 그를 보고 있었다. 막연한 거부감, 혹은 혐오 같은 것이 떠올라 있을 것이라 예상한 얼굴에서는 의외로 그런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은 모호했다. 찡그린 것 같기도 했고 신기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긴장한 것 같기도 한 얼굴. 이상한 표정이었다. 미츠키가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본 적이 있던가?
이오리는 저도 모르게 한발, 앞으로 내디뎠다.
중학생 때 같은 반에 이오리를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었다.
사실 이오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민하게 관심을 가지는 타입도 아니었고, 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실은, 별로 알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문제에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딜 가나 존재했으므로, 이오리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다. 저기, 이즈미 군. 알고 있어? S가 너를 좋아한대. 몰랐구나. 왠지 이즈미 군은 똑똑하니까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대화의 흐름. 지금 돌이켜보면, 그 애는 S에게서 부탁을 받아 이오리를 떠보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든다.
말하지 않은 것을 제가 어떻게 아나요. 이오리는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차라리 고백을 해온다면 거절하기라도 할 텐데, 이런 공기는 정말 불편하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말에 상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알지 않아? 그런 거.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어떻게 아는 겁니까.
그야…… 티가 나니까.
티가 난다, 는 말이 귀에 걸렸다. 그때 이오리는 주번이라 학급 일지를 쓰고 있었는데(이것이 그가 그 자리를 모면하지 못했던 이유다.), 처음으로 일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티가 난다는 것은 어떤 건가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그 말에, 상대는 어딘가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은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오리는 그 표정이 불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글쎄.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맴돌게 된다든가, 자주 쳐다보게 된다든가. 그런 게 아닐까?
이즈미 군은 의외로 순진하네. 그 애는 그렇게 덧붙였다.
누군가 좋아해 본 적 없어?
그 말에, 이오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오리는 미츠키의 어깨를 잡았다. 손아귀에 잡힌 어깨가 긴장으로 바짝 서 있어, 이오리는 덩달아 입이 말랐다. 미츠키가 거절하지 않는 것이 또 의외였다. 이오리는 차마 미츠키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치 물컵을 엎지른 것처럼 몸이 기울었다.
숨이 아주 가까웠다. 맞닿은 입술은 의외로 꺼끌하고, 푹신한 것 같기도 했다. 이오리는 몇 번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거의 불가항력적인 상상이었다. 하지만 그 상상이 현실로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순간은 현실성이 없었다. 누군가가 정수리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몽롱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알 수가 없었다. 미츠키는 거의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입술을 맞대고 있는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처럼, 들고 있던 그릇을 놓쳤을 때처럼 기분이 아찔한 걸까?
미츠키의 손이 그의 가슴팍으로 올라왔을 때에서야 이오리는 이것이 현실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손바닥이 이오리의 상체를 밀어 젖혔다. 정확하게는, 밀쳐내었다. 이오리는 저항 없이 두어 걸음 뒷걸음질쳤다. 이오리는 여전히 미츠키의 표정을 볼 수 없었는데, 미츠키가 그를 밀쳐내자마자 몸을 돌려 방문을 열어젖히고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오리는 긴장된 발걸음이 다급하게 멀어져가는 것을 들었다. 마치 도망치는 것 같은 발소리였다.
이오리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떨어트렸다. 눈을 감고 있어서, 옆에서 보면 기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어떤 기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최초라는 것은 최후보다도 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기원하는 사람의 마음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의 최초의 기억과 최초의 시선은 전부 미츠키의 것이다. 그 사실은 예전에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조금 울었다.

하늘을 날고 있다. 오랜만의 비행이라 그런지 안 그러던 왼쪽 귀가 콕콕 쑤셔서 목젖이 울꺽거리는 것이 확연히 보일 만큼 있는 힘껏 침을 삼키자, 막혀있던 귀가 뚫리며 비행기의 소음이 그대로 귀를 파고들었다.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그것도 모자라 공공 예절을 상실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정신을 사납게 만들었다. 이럴 때는 인위적으로라도 듣는 것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 아직 따가운 느낌이 드는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차음이 잘 되는 이어폰이라 효과가 좋았다. 창에 이마를 대고 멍하니 점점 작아지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높아 보이던 건물도 그냥 레고 블록의 한 조각처럼 보인다. 어지럽게 엮여있는 도로는 어릴 적에 즐겨했던 미로찾기 같아 보일 뿐이다. 그 위를 달리는 차들은 손가락으로 찍어 누르면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납작해질 것만 같다. 교외를 벗어나니 단조로운 색이 반복되는 풍경이 펼쳐진다. 아직 완벽하게 봄이 찾아오지 않은 산은 밑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볼품없는 색이고 바다는 생각만큼 푸르지 않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푸른 색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비행기가 잘못돼서 저 바다에 처박히기라도 한다면 과연 살아남을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망망대해든, 뾰족한 나무가 빼곡한 산이든, 차들이 달리는 도로든, 단단하게 서 있는 건물이든 그 어떤 것도 사람보다 작은 것이 없는데. 아득한 높이에서 이렇게 밑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지 새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비행기가 얼마 떠오르지 않았을 때부터 사람의 형체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력하고 허무한 존재가 품고 있는 마음은 얼마나 조그마할까. 우주의 먼지가 될 수도 없는 존재가 가진 감정은 얼마나 힘이 있을까. 그 마음과 감정이 없다 한들 이 세상은 아무 타격 없이 그 모습을 지키고 있을 것인데. 어째서 나는 그 미세한 감정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이토록 괴로워하는 것일까. 그는 결국, 자신의 그릇이 그렇게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태어나서 내린 수많은 결론 중에 제일 비논리적인 결론이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오리는 제 형이 스스로를 채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그가 주는 양만큼의 적당한 보상을 내준 적이 없었다. 노력하는 만큼의 재능을 주지 않았고, 베푸는 만큼의 애정을 돌려주지 않았다. 저렇게 자신을 소모하다가 형이 바닥나면 어떡하지? 어릴 때의 이오리는 그런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오리의 형은 그걸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도 상처는 곧이곧대로 받았다. 울기도 잘 울었다. 울음을 참느라 턱 밑을 부들부들 떠는 걸 보고 있으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저럴 거면 상처를 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될 텐데.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살아왔고, 계속 그렇게 살아갈 거였다. 기쁜 일이 생기면 기뻐하기도 잘했고, 슬플 때면 슬퍼하기도 잘했다. 기쁨과 슬픔의 색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 부어진 형의 마음속 도화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새까만 색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온통 까매진 종이에 날카로운 도구로 흠집을 내서 어떻게든 흰색을 찾으려고 해보겠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을 테다. 그것은 동생인 자신도 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실패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나는 왜 그렇게 살아왔을까. 실패를 겪고 남모르게 눈물을 훔치던 형을 봤기 때문은 아닌가. 얼굴을 감싸고 등을 들썩거리다가 빨개진 눈으로 눈물에 푹 젖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지르는 그런 장면을 종종 보았다. 형, 다음엔 잘 될 거예요. 그런 위로를 건네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이오리의 위로는 점점 그 의미를 퇴색해갔다. 형, 이제는 그만 하세요. 왜냐하면, 그런 형을 바라보는 게 정말, 가슴이 아파요.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는 건 무척이나 괴롭다. 그래서 이오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했다. 형을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여 그런 일이 있더라도 형 앞에선 그러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완벽해지면 된다. 뭐든 척척 해내면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에 인색해졌다. 그런데 수년 전 자신이 IDOLiSH7의 메이저 데뷔 기회를 망쳐버리고 끓어 넘치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뒤덮여 눈물을 흘렸을 때, 형은 작지만 따뜻한 자신의 품에 이오리를 소중히 안고 진심 어린 위로를 해주었다. 그때는 부끄럽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오리의 눈물은 형을 괴롭게 만든 적이 없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내가 형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어째서, 형한테는 늘 받기만 했던 걸까. 결국엔 자신도 똑같지 않은가. 형에게 받은 만큼 나는 되돌려 주지 못했다. 아니다. 나는 오히려 형을 갉아먹고 있었다. 형을 위해서 울지 않겠다고 한 건 핑계에 불과했다. 잔인하고 오만한 배려심으로 형의 도화지에 사포질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이오리는 괴로워하는 형의 모습을 보며 실의에 빠질 자신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이오리는 미츠키가 이렇게 사랑에 약한 사람인지 몰랐다. 어쩌면 그는 상호적인 것에 지독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는 만큼 받는 것. 미츠키는 그것을 갈구해왔는지도 모른다. 그의 그런 면은 연애할 때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가 걜 좋아하는 만큼 걔는 날 좋아하지 않는 거 같아. 쓰게 웃으며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주기만 하다가는 단물이 다 빠져버린 껌이 될 거라구요. 형이 소모하는 애정을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세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이오리는 그런 사람이 미츠키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절대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이 샘솟고 있다. 이오리는 그렇게 어렴풋이 깨달았다. 덜 마른빨래 같은 이 축축하고 음습한 감정이 형제간의 우애일 리가 없을 테다. 그리고 미츠키는 IDOLiSH7의 멤버 중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
커튼이 걷힌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형을 닮은 아이의 주황색 머리칼이 더 강한 주황빛을 띤다. 아이의 눈동자는 검은색이다. 이오리는 자신과 같은 색을 한 그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이 괴로웠다. 아이의 눈동자는 어찌 이렇게 맑을 수가 있는지.
“자, 핫케이크 먹자!”
양손에 핫케이크가 올려진 접시를 들고 오는 형이 위태로워 보여, 이오리는 몸을 일으켰으나 미츠키가 테이블 위에 접시를 놓는 게 먼저였다. 엉거주춤했던 자세를 고쳐앉은 이오리는 곰돌이 모양 핫케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빠가 핫케이크 만드는 동안 삼촌이랑 잘 놀고 있었어?”
“아니요. 삼촌 재미없어. 말도 잘 안 하고.”
“형. 죄송해요. 제가 어린 애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잘 몰라서.”
“에이. 아니야.”
“아빠. 삼촌 진짜 아빠 동생 맞아요? 둘이 너무 달라. 아빠는 맨날 웃고 재밌는 얘기도 이만큼 해주는데 삼촌은 잘 웃지도 않고 말도 없어.”
“자, 잘 봐봐. 삼촌 눈동자 색이 무슨 색이야?”
“검은색.”
“우리 이츠키 눈도 검은색이지? 삼촌이 아빠 동생이니까 둘이 이렇게 닮은 거야.”
“그런 거야?”
아이는 금세 아빠의 말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핫케이크에 시선을 돌린다. 달콤한 시럽을 잔뜩 머금은 케이크가 이오리의 입안에서 단번에 쓴맛으로 변했다. 먼지와 모래알갱이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텁텁하다. 잘게 씹어진 케이크를 삼키기가 힘들다. 컵에 담긴 물을 마셨다. 물조차도 쓰다. 곰돌이! 아이가 포크를 들고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미츠키는 곰돌이 모양의 귀 부분을 크게 잘라 아이에게 건넸다. 볼을 가득 부풀리고 핫케이크를 우물거리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형의 옆얼굴을 쳐다본다. 형은 사랑에 약해서 그 갈증을 채워주는 사람을 만나자마자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 이오리는 그대로다. 형은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다. 이오리는 여전히 하나의 가족에 머물러있다.
“형. 저 이제 가볼게요.”
“벌써? 온 지 얼마나 됐다고.”
“형 쉬시는데 제가 온 거잖아요. 저도 이제 집에 가봐야죠. 비행기를 탔더니 피곤하기도 하고요.”
“그래? 더 있다가 저녁 먹고 가지. 집사람도 곧 올 텐데.”
“다음에. 다음에 먹을게요.”
저녁이 되면 형의 아내가 돌아올 것이다. 그 사랑이 넘쳐나는 곳에서 서둘러 나와야 할 것 같았다. 아무도 모를 테지만 이런 마음을 갖고 그 집에 머물러있는 제 자신이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때는 형이 계속 갈증을 느끼길 바랐다. 그 갈증은 자신이 채워줄 수 없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다고 한들, 우리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 수 없다. 형이 소모하는 만큼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곳에서 형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것만은 진심이다. 형에게 주지도 못할 거면 받지도 말아야 한다. 적어도 빼앗지는 말아야 한다. 형이 스스로 쌓아 올린 행복을 나 따위가 망쳐서는 안 된다. 제가 무슨 염치로 그럴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끝까지 숨겨야 한다. 이런 감정이 존재하든 소멸하든 세상은 아무런 타격 없이 그 모습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형의 배웅을 받으며 이오리는 그 집의 문을 스스로 닫았다.

1
이오리가 사랑을 말해올 때, 가족 간의 사랑을 되새기거나 내밀하게 속삭이는 일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라 하마터면 오해를 할 뻔 했다. 이오리는 이렇게 말했다.
형, 제가 형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 가족끼리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도 불결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서 우리가 선택한 건 세상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만 불결하게 만들었다. 그래야만 안온한 그릇에 안도할 수 있다. 그러나 네가 나를 보는 감정과… 내가 너를 볼 때 느끼는 감정. 그걸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난 언제나 핏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오리는 영특하게도 재빠르게 되짚었다. ‘그런 건 관계 없어요. 형.’
이오리가 무슨 일로 핏줄과 사회와 우리를 분리하고 얇게 찢어냈는지는 모를 일이다. 우리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어떻게 알아챌 수 있었을까.
나는 이오리의 영혼이 그 아이의 몸을 빠져나와 우리 둘을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했다. 남이 되면, 달리 보이는 경우가 있으니. 그러나 나는 남의 눈이 되는 법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날 밤 나는 이오리의 곳곳을 만졌다. 갈비뼈와 빗장뼈, 눈꼬리와 입꼬리. 눈썹 사이의 움푹 들어간 콧대와 목울대. 다르게 생겼구나. 하지만 역시 익숙하다.
2
그러니까 나는 우리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닮은 점부터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부모가 같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도 서로가 닮은 사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세상을 일궈나가는 일과 비슷한 정도였다.
모르는 사람끼리 모르는 기질을 가지고, 알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하는걸 마음 먹는다면 서로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은 거의 유일에 가까웠다. 그러니 부모님에 비해 이오리와 나는 유일보다는 그 이상의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같은 집에서 자랐고, 같은 음식을 먹었다. 같은 학교에도 다닌 적이 있으며, 우리 둘 다 달콤하고 따뜻한 밀가루와 설탕, 계란 냄새를 좋아했다. 어쩌면 성격과 취미가 일부분 닮았을 수도 있고, 무의식에 손가락의 마디를 문지르거나, 긴장할 때마다 신을 찾는 버릇이 비슷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이오리의 전유물인 특성들을 늘 질투하거나 부러워하며 사랑했지만, 그 말은 우리의 공통점마저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우리의 공통점을 사랑했다. 나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스스로가 싫을 때조차 나는 이오리를 사랑해왔으므로. 이오리를 완전하게 사랑하는 일은 나의 일부분만큼은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가 다른 부분을 이야기해볼까.
이오리는 모두에게 사랑받기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도, 좋아하는 몇 사람에게만 인정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오리와 달리 사람에게 사랑받는 능력을 탐구하고 갖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게 걱정된다고 넌지시 돌려 말하자 이오리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도 순순히 인정했다. 이오리가 그렇게 굴어도 이기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데도, 이오리는 계속 나에게 승리를 안겨주듯이 굴었다.
며칠 뒤에는 학생회에 들어갔다고 소식을 전했다. 학생회가 그렇게 들어가기 쉬운 곳이었는지는 몰랐지만, 이오리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이오리는 내 걱정을 해소하고 기대에 부응하려던 자신의 좁은 발걸음이자 큰 변화를 인정받고 싶었는지 칭찬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이오리가 한턱 내듯이 나를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엔 감사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도 축하와 기특한 마음으로 곰돌이 모양 팬케이크를 구워주었다. 다만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으나, 이오리는 내가 생각하는 평균에 다가서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는걸 이제 와서 깨달았다.
그 이후에는 집에 학생회 친구를 데려온 적도 있었다. 이오리가 집에 친구를 데려오는 일은 전무했는데(데려올 만큼 친한 친구가 있었던 적도 없었으니) 어느 날 부모님의 베이커리 일을 오전동안 도와드리고 집에 돌아갔더니, 낯선 학생 단화가 현관에 두 켤레 놓여있었다. 이오리와 비슷한 신발 사이즈를 잠깐 바라보았고, 거실 소파에는 낯선 아이들이 있었다. 이름은 미노루와 하야시였다. 학생회 출신의 두 사람은 거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보고 조금 얼떨떨하달까 놀란 눈치를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편하게 있어."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말로 남의 집에서 편하게 있을 정도로 뻔뻔하지 않고, 계속 내 눈치를 보기에는 강단이 있는 녀석들로 보였다. 이오리는 이오리 같은 친구들을 사귀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집에 데려와서 나에게 보여줄 만한 아이들을 골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미노루는 내가 가져다준 빵 봉투를 기꺼이 받으며 말했다.
"이오리가 이야기를 무척 자주 해줬어요."
"내 이야기를?"
"그런데 생각과는 조금 다르네요."
"이오리와 내가 닮지는 않았지."
"미노루 씨. 괜한 이야기 하지 마세요. 형도요."
"들은 이야기와 좀 다르다는 뜻이었는데, 나쁜 의미는 아니에요."
나를 신경 쓰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방으로 들어가서도,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답잖은 농담을 했는지 드문드문하게 말소리가 들리고선 웃음이 터지는 듯 했다. 이런 날도 있구나 싶었지만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이것 또한 칭찬해줘야 하는 일일까?
슬슬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가자 이오리는 현관까지 아이들을 마중했고, 미노루와 하야시는 현관에 오렌지빛깔 저녁노을이 스며드는 문을 통해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집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미츠키는 문고리를 잡고 있는 이오리에게 바싹 붙었다.
"형?"
하고 태연하게 물었지만 약간의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나는 현관문과 자신의 몸 사이에 이오리를 가두고 입을 맞췄다. 닫힌 현관문에서는 더이상 햇빛 자국도 없었지만 머리 쪽으로 뜨거운 열기가 담긴 빛이 쏟아진다고 느꼈다.
우리가 유일하게 집안에서 키스하는 건 현관문을 붙잡고 형광등 아래에서 잠깐 입술을 스칠 때뿐이었다. 우리는 입을 맞추면서 귀에 더 집중했다. 문 바깥으로 걸음 소리가 들려오면 문을 잠갔다 해도 재빠르게 거리를 벌리고 각자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집 앞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이웃의 족적이라고 해도, 우리의 연결을 끊어내고 긴장감이라는 풍선을 터뜨리는 데에는 충분한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했어?"
그리고 입술을 비비자 이오리가 가느다랗게 소리를 냈다.
"누가 오는 것 같아요."
"착각이야."
다시 입술을 붙이고 축축한 혀를 머금자 이번엔 팔을 붙잡혔다. 정말로 뒤쪽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래도 이오리를 놔주지 않았다. 익숙한 신발 소리, 뒤축부터 발을 내디디면 운동화의 밑창이 바닥을 차는 소리. 아버지의 발걸음인가? 그 소리가 우리의 귀와 머리를 점령하듯, 현관문 하나를 타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오리의 손에 힘이 실렸지만 아프지 않았다. 우리는 긴장감에 숨을 쉬는 것도 잊고서 침을 나눴다. 입술을 뗐을 때는 집 앞을 '스쳐 지나간' 발걸음 소리는 이미 멀어져있었고, 어쩐지 입술에서 시큼한 맛이 났다.
이오리는 문고리를 꽉 잡아당긴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치 바깥에서 누가 열려고 하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갇힌 것 같진 않아?
"나에 대해 친구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했어?"
"...자랑스러운 형이라고요. 그뿐이에요."
이오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3
하야시와 만난 건 우연이었다. 우리는 같은 사거리 길목에서 같은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때 이오리는 몸이 안 좋아서 며칠 집에서 쉬고 있을 때라 그런지, 하야시는 나에게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하고, 그다음 자기 소개를 하고 나서 이오리의 안부를 물었다.
"이오리는 집에서 쉬고 있어. 내 동생은 예민해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앓는 것 같아. 하야시 군과 만났다고 전해줄게."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자전거에서 내려 기다란 횡단보도를 내 옆에 서서 걸으며 말했다.
"사실 학교에서 일이 조금 있었어요. 이즈미가…. 그러니까 이오리가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요."
하야시가 말한 이야기는 이랬다. 아이들이 체육 시간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가 장난으로 학급 티비 스크린으로 게이 포르노를 틀어두었다. 아이들이 다 함께 반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 포르노가 재생 중이었는데, 이오리가 그걸 수습하기 위해 컴퓨터를 건드리다가 결국 교탁 위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구역질을 했다고. 그 이후로 학교를 쉬고 있어서 걱정이라고 전했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오리가 그런 반응을 보인 건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민하다고 말씀하신 부분,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서 하야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자전거를 탄 채 길목을 건너고 자취를 감췄다.
그 날 미츠키는 돌아와서 이오리의 방문 곁에서 괜찮냐고 몸 상태를 묻고 사온 푸딩을 건네주고 열을 잰 다음에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서 컴퓨터를 켜고, 이어폰을 연결하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게이 포르노를 검색했다. 몇 가지 단어와 성인 인증 단계를 통과해서는 손쉽게 영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어폰의 소리에서는 남자가 끙끙 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욕설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고, 물이 튀는 소리, 살이 부딪히는 끈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면 속의 남자들은 여남 섹스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는데, 옆 방에서 아픈 이오리가 누워있다고 생각하면 잠시동안 미안한 마음이 되었으나, 사실은.
사실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4
내 여자친구 이름은 아카리. 모두가 성을 부르지 않고 '아카리'라고 부른다.
그런 설정이었다. 이오리는 쉽게 믿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이오리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어."라고 이야기하자, 이오리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이후엔, 미소를 지으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거야 놀라는 이오리의 마음도 이해 가는데, 이틀 전만 해도 우리는 또 현관 아래에서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면, 우리가 모두가 일컫는 연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아카리를 좋아하는 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으로는 허락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아카리를, 그리고 이오리는 다른 사람을 능히 좋아할 수 있었다. 그야, 연인들 사이에서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기회나 자격이 가끔은 주어지니까.
가족이라면 또 다른 가족을 만들 수 없지만. 연인이라면….
그러나 그 반대쪽이 이오리처럼 웃거나, 축복의 말을 건네서는 안됐다.
나는 이걸 이오리가 먼저 우리의 관계를 다시 언제나 불결하지 않고 세상의 한 구석에 안주할 수 있는 곳을 포기하지 못한 채 비굴해지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소개해주면 만나줄 거야?"
"그럼요. 형이 좋아하는 사람인데요. 어떤 사람인가요?"
나는 잠깐 고민하고 답했다.
"...밝고 쾌활해. 상냥하고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이야."
"그렇군요."
그리고 이오리는 촘촘하고 얇은 실로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무언가에 몰입하더니,
"저와는 닮지 않았네요. 그럴 것 같았어요."
하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반응도 내비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어내듯 마지막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가상의 아카리에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카리는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도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그칠 때까지 기다려. 그럴 때는 비가 그칠 때가 언제인지 가늠이 된대. 그러면 남에게 부탁하고 귀찮게 하는 건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거야."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 이오리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우리의 이야기 말고는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오리는 아카리와 만날 시간도, 그런 순서도, 이유도 없었지만 의심하지 않고 아카리를 실존하도록 만드는 데에 힘을 더했다. 그렇게 아주 의미 없는 '아카리 만들기'를 마치면, 어느새 그녀는 우리의 공통점과 시간을 먹고, 삼키고선 커다란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늘, 이 거짓된 구연동화에 질려서 모든 것을 폭로하듯이, 정말로 이오리 너는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싶냐고 묻고 싶었다.
아카리를 대변하고서? 나를 뺏겨도 좋은 거야, 하고 묻듯이.
아카리는 존재하지 않아.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 너와 나 사이에는 공허하지 않은 빈 공간 뿐이라고. 사랑해, 가족이 아닌 마음으로.
5
이오리가 다짐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카리 씨와 만나게 해주세요.”
나는 왜냐고 묻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 어때? 그러면 저녁을 먹기 전에. 아카리와 우리 동네에서 만나서 같이 저녁을 먹는 거야. 그렇게 계획을 짰다.
그때쯤의 아카리는 갈색 단발머리에, 키가 나보다 작고, 매운 것을 잘 못 먹으며, 요리를 좋아하고, 특히 내가 해준 요리를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곰돌이 팬케이크를 가장. 또 나와 같은 학교를 나왔으며, 문구류를 좋아하고, 귀여운 토끼 장난감을 좋아하고,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인사하고,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오리와 나는 집을 나와서 해가 지는 마을 길목을 걸어 다니는 동안 내내 아카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와 묘한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오리를 데려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우선은 발이 내키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공원을 지나칠 땐 이오리와 그곳에서 모자를 잃어버려서 한참 찾아 헤맸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떠올랐지만, 그곳에도 아카리가 있었던 것처럼 추억을 꺼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부턴 아카리가 설 장소가 없어졌다.
우리는 이 마을에서 너무 오래 살았고, 우리는 서로와 함께한 지 너무 오래 되었고, 서로를 사랑한 지…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길게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카리가 필요할까?
정말로? 아카리가 있었으면 좋겠어, 이오리?
우리는 결국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부모님이 운영하는 베이커리가 위치한 아케이드 쇼핑몰 입구에 섰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서 나란히 걷는 동안 거리에 아이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엄마, 교복을 입고 하교하는 학생들, 자전거를 타고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 책을 고르는 사람, 꽃을 품에 안고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 안에 아카리가 있을까?”
“여기가 약속 장소가 아닌가요?”
“아카리가 있다고 생각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형.”
“그야. 아카리가 존재한다면, 너무 손쉽게 사랑받을 만 하잖아.”
미츠키는 상점과 상점 사이의 골목으로 이오리를 잡아당겼다. 이오리는 저항할 의지도 없이 끌려가서 벽 사이에 납작하게 붙었다.
“나한테 키스할 수 있어?”
“무슨 소리세요. 지금은 아카리 씨를…”
“아카리는 없잖아.”
“하지만…”
이오리는 하지 못해도 나는 할 수 있었다.
나는 이오리의 어깨를 붙잡고,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끌어당기며 입술을 붙였다. 이오리가 뒤로 주춤하며 밀치려고 들었지만 힘을 주며 버텼다. ‘형, 뒤에 사람이…’ ‘신경 쓰지 마. ‘
이오리의 입술을 핥자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고 힘없이 틈이 벌어졌다. 뒤에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우리를 보기 위해 걸음을 멈춘 것처럼 그 소리가 끊겼다. 그러자 이오리가 강한 힘으로 내 어깨를 밀치며 멀어졌다.
나는 뒤로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뒷걸음질 치다가 이오리가 가슴 위를 움켜쥐며 지나쳐가자 고개를 돌렸다.
이오리가 움직이는 건 꼭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이오리는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가슴이 팽팽해지며 몸이 살짝 위로 솟았지만 얼굴은 찡그린 채 구겨져 있었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잠깐만요, 하고 외치고선 허리를 천천히 숙였다.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지고 귀를 덮었다.
눈 대신 정수리가 보이고 이오리는 바닥을 향해서 머리를 숙였다.
한쪽 손은 배를 움켜쥐고, 한쪽 손은 무릎을 짚었다.
그리고 기침을 내뱉고선, 듣기 괴로운 목소리와 함께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기침과 함께 나오는 것 없이 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이오리를 바라보자 시간이 원래대로 흘러갔다.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걱정과 혐오를 내비쳤다.
나는 입술에 묻은 침을 손으로 닦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휘청이는 대신이었다. 이오리가 고개를 들고 젖은 눈으로 날 쳐다보자 결국 목소리로 형상화된 숨겨왔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하. 역시 그렇지. 정말로 불결하지.”

“미츠키 동생은 여자친구 있어?”
“응?”
어처구니없는 말에 미츠키는 하교할 준비를 하다 말고 시선을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하는 얼굴에 물어본 반 친구가 응 그냥 관심이 생겨서~ 하고 느긋하게 답을 내놨다. 남의 얘기가 제일 재미있는 법이라고 소란한 교실 분위기 속에서도 그걸 들은 다른 친구들도 간섭하기 시작했다.
“미츠키 동생? 어떤데? 본 적 없는데.”
“왜 그 저번에 왔었잖아. 이즈미 우산 가져다주러. 중학생인데 완전 예쁘게 생겼어.”
“갑자기 남의 남동생 얘기는 왜 하는 거야. 물론 내 동생이 미소년이긴 하지만.”
“우와 그 정도야? 동생인데? 너 눈 높잖아, 이즈미.”
“맞아 얘 좋아하는 아이돌 봤는데 하나같이 다 잘 생겼잖아. 일부러 비주얼 멤버만 좋아하는 거야?”
“아니거든. 그리고 다른 멤버들도 다 잘 생겼어!”
미츠키가 웃으면서 버럭 태클을 걸었다.
“그나저나 이즈미, 동생 사진 없어? 저렇게까지 말하니까 궁금한데.”
“아니 있기야 있지만…”
“아니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너희들 왜 선수 치는 거야.”
“남의 남동생한테 수작 걸지 마.”
웃으며 얘기하긴 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미츠키는 보여주기 싫었다. 동생이 다방면으로 잘나고 잘생긴 것도 맞는 말이지만 분명 안 닮았느니 어쩌느니 할 테니까. 동생한테 허락도 안 받았는데 보여주는 건 좀 그렇잖아 하며 말을 돌리려던 찰나에 다시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미츠키는 여자친구 있었나?”
“저번에 차였다고 하지 않았나?”
“사람 앞에 두고 아픈 말 하지 말아줄래? 진짜 너네 대화가 너무 두서없는 거 아니냐고.”
“미안~.”
“내가 관심 있는 건 미츠키가 아니구 미츠키 동생이라고.”
“그니까 관두라니까! 그리고 나도 잘 몰라.”
“엥 진짜?”
“의외네. 동생이랑 사이좋은 거 아니었어?”
“그렇게 친한 거 아냐. 평범하지 뭐. 이오리도 나 여자친구 있었던 건 모를걸.”
하긴 아무리 친하더라도 동생한테 연애 여부 같은 건 숨길 수도 있지 하는 분위기가 되어 대충은 넘어갈 수 있었다. 끝까지 사진 보여줘 하는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모른 척 무시했다.
***
겨울이 다가와서 그런 건지 5시경 임에도 기다란 그림자가 어둑하게 현관을 가득 메웠다. 어두컴컴한 집안 그림자에 그 기다란 그림자가 삼켜질 때쯤 계단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얼굴은 앳되지만 키는 미츠키 정도 되는 소년이 나타났다. 그 소년은 말했다.
“다녀오셨어요. 형.”
“다녀왔어! 굳이 내려와 보지 않아도 되는데.”
“힘든 일도 아닌데요.”
미츠키는 대답은 안 하고 이오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곤 괜히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단정하게 쭉 뻗어있던 머리가 한바탕 헝클어졌다가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오늘도 조금 늦으실 것 같대요.”
“그 정도로 바쁜가. 같이 가서 도울까?”
“저도 아까 여쭈어봤더니 그 정도는 아니라고…. 집 지켜 달라고 하셨어요.”
“그렇구나. 집 잘 지키고 있었구나 이오리. 우린 그럼 저녁 준비라도 할까?”
“네 형. 외투 입고 나올게요.”
“아 나도 가방 놓고 와야 되니까 같이 올라가자.”
미츠키는 2층에 있는 방문을 벌컥 열고 가방을 보지도 않고 던지듯 두고 나와선 부엌에 걸려있는 장바구니를 왼손에 들었다. 이오리는 그 사이 현관으로 나가 코트를 잘 여며 매고 운동화를 고쳐 신은 후 신발을 신으려는 미츠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미츠키는 그 손길을 됐다는 듯이 되려 장바구니를 어깨에 꽉 끼고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황혼이 하늘을 불태우듯 사방에 빛을 뿌리고 있었고, 그 위로 감색 빛의 하늘이 그 열기를 식히려는 듯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꺼져있던 가로등도 하나둘씩 제 소임을 다하려는 듯 여러 번 깜빡깜빡이며 켜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골목을 돌고 돌아 마트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자동문이 닫힐 틈도 없이 고객들을 맞이하고 배웅해주고 있었다. 분주한 마트 안에 들어섰을 때 이오리는 가까이에 있는 색이 바랜 노란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집어 들고 미츠키 옆으로 달려와 섰다. 그 행동에 응하듯 미츠키가 말했다.”
“이오리, 먹고 싶은 거 있어?”
“형이 해주시는 거라면 다 좋아요.”
“그게 가장 어려운 메뉴인데.”
“…형을 곤란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장난이야! 그치만 저녁에 뭐 먹을지 고민하는 건 늘 어렵긴 하지. 오 가지가 싼데 가지튀김 어때.”
“맛있을 것 같네요. 저쪽의 가라아게도 세일하고 있대요.”
“좋아. 형아가 따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검은 가쿠란 소매를 걷는 행동을 과장되게 보여주는 미츠키를 보고 이오리도 살풋 웃었다. 이후 냉장고에서 떨어진 당근, 파, 버섯, 내일 먹을 두부 등 식자재를 한가득 담고 계산대에서 계산 한 후 챙겨온 장바구니에 식재료를 넣어 들고 밖으로 나와보니 이미 하늘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미츠키는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길래 괜히 잘 잠겨있는 이오리의 코트를 한 번 더 여며주었다. 감사합니다 형 하는 소리에 별말씀을하고 대답을 하고 집에 가려는 찰나 어린, 아니 이오리 나이쯤 되는 여학생 남학생이 손을 잡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학교에서 애들이 물어봤었지. 나도 잘 모르는데.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다. 동생은 집에서 전혀 학교에서 있었던 얘길 안하니까. 이오리가 초등학생 시절, 학교 관련한 말을 하나도 안 하길래 혹여 누가 괴롭히나 싶어 찾아간 적도 있었는데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오리 저기 말이야.”
“네?”
“저기… 갑자기 조금 이상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지금 교제하는 사람이라던가…있어?”
“네?”
이오리가 똑같은 대답을 두 번 했다. 동생의 반응을 보니 어처구니없는 걸 물어봤구나 싶어 미츠키는 무마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하하 아무것도 아냐. 내가 이상한 말을 했지 아무리 가족이라도 말이야. 장난이….”
이오리가 미츠키가 말을 끊고선 답했다.
“저는 없어요. 한 번도 누군가와 교제해 본 적은. 형은요?”
“응? 나?”
“저도 말씀드렸으니까 형도 말해주세요. 저만 말하면 치사하잖아요.”
“그치만 이오리는 없다고 했잖아!? 거짓말 아니야? 이오리처럼 잘난 녀석이?”
“형한테 거짓말 안해요.”
“진짜?”
“진짜입니다.”
“앗 그 의심해서 미안 이오리. 그게 아니라….”
“단순히 연애 따위에 흥미가 없었을 뿐이에요. 형은 있으셨을 것 같지만.”
“으음 묘하게 애늙은이 같은 대답이네. 나도 지금은 없지만, 전에 있었던 건 맞아.”
“역시 그렇군요. 몇 명이나요?”
“둘……? 아니……으 괜한 말을 해버렸네? 하하.”
괜히 부끄러워 미츠키는 머리를 몇 번 만졌다. 앞서 걷고 있는 동생의 표정은 일부러 고개를 돌린 것인지 어두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머리 위로 가로등 불빛이 비춰질 뿐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길게 느껴지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미츠키는 이런 질문을 왜 했는지 후회하기 시작했다. 몰라도 괜찮았을 텐데 호기심이라는 게 뭔지. 그리고 뭔가 자기만 비밀을 잃은 듯한 느낌에 마음 한구석에서 분한 느낌도 들었다. 거의 집에 도달했을 즈음 침묵을 먼저 깬 건 이오리였다.
“형이 좋아했던 분들은 어떤 분들이셨나요.”
“응?”
“으음 헤어진 사람들한테 말 얹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다들 좋은 애들이었어. 착하고 상냥한 애들.”
“그렇다면 형이랑 비슷한 타입의 사람들이었겠네요”
“응?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이오리가 형아를 그렇게 봐주고 있다는 뜻이야?”
“당연하죠. 저는 그 사람들을 모르지만, 그 사람들도 형을 상냥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겠죠.”
“아 부끄럽네. …그래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역으로 이오리는 어떤 타입 좋아하는데? 아직 사귀는 사람은 없지만 어떤 타입이 이상형인지 생각은 해 뒀을 거 아니야?”
“……귀엽지만 강하고 다정한 그런 사람이요.”
“…뭔가 알기 쉽네!”
“네? …뭐를요?”
“아니 뭔가 그럴 것 같았다는 의미야!”
이오리는 미츠키 대답에 깜짝 놀라 뒤를 급히 쳐다보았다. 미츠키는 그냥 호쾌한 미소만 짓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오리가 의미 모를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때 미츠키의 뒤쪽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미츠키도 뒤를 돌아봤다.
“미츠키, 이오리 어디 다녀왔나요?”
“앗 지금 돌아오신 거에요? 저녁 준비 해야 하는데 너무 느긋하게 다녀왔나봐요.”
“같이 하면 되지! 둘이서 장 보느라 고생 많았네!”
미츠키의 아버지가 미츠키가 들고 있던 짐을 자연스럽게 뺏어 들고 어머니는 양 손으로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어서 집에 가자며 이끄는 손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사람도 따라주었다.
***
며칠 후 미츠키는 또 이오리와 외출할 일이 생겼다. 그 이유는 이오리가 매년 쑥쑥 커버리는 바람에 작년에 맞던 옷 사이즈가 작아졌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이오리 옷은 어머니가 사다 주시는 일이 많았지만 이오리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는 미츠키가 함께 가주는 일이 많았다. ‘이오리도 자기 스타일이라는 게 있잖아. 엄마가 맨날 사다주면 옷 고르는 안목이 떨어지니까!’ 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러면서 의도치 않았지만 미츠키는 이오리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파악하기 쉬워졌다. 대체로 단정한 계열의 옷들을 많이 고르되 포인트로 귀여운 동물 자수나 무늬가 있는 옷들을 고른다는 거. 이오리 본인도 모르게 그런 종류의 옷을 골라버린다는 건 모르는 듯 싶었다. 지난해 여름 같이 옷을 사러 갔을 때 슬쩍 물어봤더니 어쩌다 보니 겹친 것뿐이다 하는 얘기를 할 뿐이었다. 가끔 안 어울릴 만큼 귀여운 옷을 양손 가득 들고 올 때도 있었는데 그건 좀 고민하는 듯 싶더니 모조리 ‘형 이건 어때요?’라고 물어올 뿐이었다. 미츠키가 불만스럽게 쳐다보면 이오리는 움찔하는 듯 싶었지,만 이정도야 뭐 하는 마음으로 몇 번 입어 보기도 했었다. 역으로 미츠키가 ‘이오리 이거 입어봐!’ 하며 자신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단정하지만 멋있는 옷을 한가득 들고 달려올 때도 있었으니까.
오늘도 이전의 날들과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시즌을 맞아 최근 유행을 한껏 반영한 옷들을 구경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하며 대충 옷가지를 몇 벌 구매하고 지칠 때 즈음 미츠키는 이오리와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백화점 안쪽 구석에 마련된 기다란 벤치에 앉았다. 늦가을이지만 커다란 백화점 안은 따뜻해서 돌아다니며 지친 몸을 아이스크림으로 위로하기엔 딱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차에 누군가 ‘이즈미!’ 하고 말을 붙였다. 한 사람을 부른 거지만 두 사람이 함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후 얼굴을 보고 대답한 건 미츠키였다.
“아, 너도 쇼핑하러 왔냐?”
“뭐 그렇지!”
“혼자 왔어?”
“아니 엄마랑. 짐꾼이지 뭐. 잠깐 따로 움직이기로 했거든. 그쪽은 동생?”
“아 응. 이오리 이쪽은 내 친구야.”
“안녕하세요”
“안녕. 학교에서 얘기 많이 들었는데.”
“맞아.”
“평범하다더니 동생이랑 데이트까지 할 정도면 사이 엄청 좋은 거잖아.”
“데이트라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미츠키가 웃으며 말을 받아쳤다. 미츠키의 친구는 미츠키 옆에 앉더니 내일은 축구 경기를 하자느니 쪽지시험이 어쩌구 하는 가벼운 얘기를 주고받다가 전화를 받더니 어머니 전화인지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고 내일 보자 하고 훌쩍 일어나서 떠나갔다. 가기 전에 이오리에게 손 인사도 남겼다. 얼결에 이오리도 손인사를 하려다 움찔하고 손을 내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오리 미안. 지루했지?”
“아니에요. 형 친구답네요.”
“그게 무슨 의미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 형 그런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없이 뭐냐는 듯 웃으며 쳐다보는 미츠키의 얼굴에 이오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진짜 데이트는 어떤건가요?”
이오리 질문에 미츠키는 잠깐 멍해졌다. 지금 얘가 뭘 물어본 건지 싶어 생각하다 웃으면서 말했다.
“아까 걔가 데이트하냐고 물어봐서 그런 거야? 이오리랑 내가 친해 보여서 그런거고 아무것도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제가 형이랑 함께하는 게 데이트가 아니라는 건 알아요. 저는 동생이니까요. 하지만 저번에 교제했던 분들이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형은 사랑하는 사람과 어떤 데이트를 하는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게 아니고…. 아 정말이지. 저번에 왜 그런 말을 왜 꺼냈는지 모르겠다.”
“저는 형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요… 그 정도로 대답하기 곤란하신가요. 죄송해요. 그렇다면 없던걸로 해주세요.”
“아니 그것도 아닌데….”
미츠키는 며칠 전 그걸 물어본 과거의 자기 자신도 원망스러웠고, 굳이 저런 식으로 말한 친구녀석도 원망스러웠다. 이것저것 과거 일을 생각하다보니 부끄러워져 머릿속이 뒤죽박죽 하다가, 앞으로 이오리 연애 인생에 중대한 도움을 줄 수도 있잖아하고 마음속으로 합리화를 하고 나니 이상한 용기가 샘솟았다.
“보통은 함께 카페에 가서 떠들거나, 놀이공원에 간다거나? 쇼핑을 같이한다거나 했었지.”
“그런 곳은 저랑도 갔었잖아요?”
“으음 그렇긴 하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라는 건 마음가짐이 다른 것 같아. 그 순간의 공기가 다르달까.”
“공기요?”
“그냥 순간순간의 두근거림. 마음이 붕 뜨는 것 같고 그 사람과 나만 단둘만 이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정도로. 그 애가 오기 전까지의 기다림이 설렘으로 바뀌고, 그 애가 즐거워하면 나도 즐거워지는 그런 감정이! ……느껴지는 게 데이트 아닐까 생각해.”
미츠키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얘기했다. 과거의 얘기지만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그건 뭘까요.”
“…어?”
“저도 형과 함께 있으면 두근두근 거리고 마음이 붕 뜨는 것 같고, 하지만 형이 제가 아닌 누군가와도 이런걸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싫어요. 이건, …뭘까요?”
“…그, 글쎄. 나도 이오리랑 같이 쇼핑하고 놀러 다닐 때 즐겁지만, 그런 마음이 든다고 느끼는건 이오리가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착각한 게 아닐까? 하지만 이오리가 그 정도로 형아를 좋아해 준다면 기뻐.”
미츠키가 당황한 얼굴로 이오리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오리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그런걸까요 하고 마주보고 웃었다. 다만 이렇게 끓어오르는 마음이 단순히 착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형을 곤란하게 해버린 것 같으니까, 이오리는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줄곧 혼자서 마음속에 품어야 할 괴로운 감정인 것을 알면서도.

.png)
.png)
.png)
.png)
.png)
.png)
.png)
.png)
.png)
.png)
.png)





























